저자 이디스 워튼
출판사 문예출판사
1800년대 후반,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여성 작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은 도입부가 참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제목이 <이선 프롬>인 것도 눈에 띄었다. 우리 식으로 하면 김 서방인지, 이 아무개인지 알 수 없지만, 주인공의 이름을 소설의 제목으로 단 것도 이채롭게 느껴졌으며, 이 소설은 주인공이 소설의 내용을 펼쳐 보이지 않고 극 중 화자가 등장해 주인공의 사연을 더듬어 나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의 메사추세스 주에 있는 스타크필드(겨울이 긴, 황량한 들판을 뜻하는 상상의 마을, 환경이 낙후한 시골 마을이고 대부분 주민들의 주업이 농사와 나무 캐는 일이며, 오로지 겨울에 썰매 타는 것만이 젊은 사람들의 유흥이자 낙이다)에 출장 와서 머물게 된 소설의 화자는 성공한 중년의 엔지니어다. 그는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접하려다 항상 마주치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50을 넘긴 듯하고, 다리를 절뚝대며 마차를 모는 무표정한 사나이… 훤칠한 키에 젊었을 땐 꽤 수려했을 법한 용모, 강렬한 눈빛, 주름과 백발과 절름발이인 그의 상태, 모든 것이 그에겐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스타크필드는 문화 시설과 교육 시설이 들어선 인근에 생겨난 신도시로, 영리한(?) 사람은 거의 다 빠져나갔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에게 생긴 어떤 사고 때문에 평생 스타크필드를 벗어나지 못하며 늙어가는 사나이의 이야기가 얼마 안 남은 이웃 사람들의 증언으로 시작된다. 스타크필드의 가난한 청년 이선 프롬은 부모님의 대를 이어 농사와 나무꾼 일을 하며 자라났지만, 20살이 되던 무렵 이웃 신도시에서 어렵게 엔지니어 교육을 받으며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지적인 성장을 이루며 유능한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행복의 시간도 잠시,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영원히 고향에 발이 묶인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여의고… 부모님의 병 간호에 잠시 도움을 주었던 먼 친척 누나뻘인 지나와 덜컥 결혼해 버린다. 너무나 무서워서, 혼자 남겨진 것이 두려워서 결혼을 선택한 이선 프롬의 나이는 21살이었다. 그러나 그 결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삶에 큰 불행으로 작용하는데 부인 지나가 큰 병을 앓게 된 것이다. 신장이 망가지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적 증상을 보이며 지나는 ‘내가 니 부모를 간병하느라 몸이 망가졌다’며 온갖 불평 불만에 바짝 바짝 늙어가며 고약한 넋두리로 이선의 삶을 옥죄어 온다. 애정과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 속에서 7년 동안 이선은 묵묵히 아내의 병구완을 하고 가난한 마을에서 먹고 살려고 엔지니어 꿈을 접고 나무 캐고 농사짓고 뼈가 빠지도록 일을 하는데…
아픈 부인 지나의 집안일을 대신해서 도와 줄 메티가 찾아오고 나서부터 이선의 삶은 활기를 띈다. 메티는 지나의 먼 친척이라고 하지만, 고아나 다름이 없고 돈이 없어 오갈 데 없는 처지다. 그러나 메티는 이제 갓 피어난 20살, 너무나 예쁘고 명랑하고 지적이기까지 하다. 이선의 집에 온 날부터 동네 총각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메티의 생기 있는 젊음과 행동은 병든 아내 지나와는 너무나 대비되는 것이었고, 이선은 갈수록 메티에게 끌렸고 메티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메티와 이선은 서로 마음 깊이 사랑하지만 내색하지 못하고 가슴을 끙끙대며 설레는 날들을 보내는데, 이를 눈치챈 지나가 질투심에 못 이겨 오갈 데 없는 메티를 쫓아내려 혈안이 되어있다. 이선이 메티를 보호하려 아무리 노력해도 지나의 고집을 꺾지 못한 채 메티가 쫓겨나는 날, 기차역까지 배웅해 준다는 핑계로 이선과 메티는 함께 나가 즉흥적으로 동반 자살을 시도한다. 겨울이 오면 꼭 썰매를 타자고 한 약속을 헤어지기 전에 떠올린 이선과 메티는 마을 제일 높은 언덕 위에서 썰매를 탄다. 그들이 탄 썰매는 급 강하 하여 쇠로 만든 가로등에 곤두박질 쳐 산산조각이 난다. 그리고 이선과 메티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까지 줄거리를 쓰고 보니 내용은 별거 없다. 불륜을 다룬 내용이라 좀 싱거운 느낌도 든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명작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무얼까? 이 책은 1911년에 출간되자마자 도덕적 논란에 휩싸였으며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 열풍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으며 작가의 삶이 투영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 속의 스타크필드(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황량한 곳)는 자연적으로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장치로서 역할을 해내고 있으며, 주인공 이선 프롬은 척박한 환경에 적응해 자라난 이의 우직한 삶의 태도를 여과 없이 표출하였고, 불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입맞춤, 정사씬 없이 플라토닉한 사랑을 농도 있게 그려냈다는 것(작가의 경험담이라 더 그랬겠지), 인간의 자유 의지, 도덕이라는 틀 앞에서 작아지는 인간의 무력함, 인생의 무상함까지 골고루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