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혼비

출판사 제철소

40을 넘긴 김혼비 작가의 첫 에세이집,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독자들로부터 반응이 꽤 좋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술>이라는 두번째 에세이집을 내며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의 삼원색은 책, 술, 축구인데 축구에 이어 술로도 책을 쓰니 세상의 모든 색깔을 다 가진 기분이다.’ 비주류 작가라는 핸디캡 때문에 주류 작가가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 인생에서 가장 많이 한 경험, 술로 글을 써 주류 작가가 되어보자고 포부 당당하게 밝히는 그녀의 입담이 천연덕스럽고 재기발랄하다.

술꾼의 이야기라고 하나, 술을 별로 안 하는 사람에게도 읽으면 술술 먹힐 것 같은 이 느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한 미래, 생존경쟁에서 오는 고립감, 인간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 때문에 충분히 공감이 되고, 작가의 타고난 필력에서 오는 설득력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반평생에 걸쳐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것도, 가장 몸속으로 쏟아부은 것도 술이니, 술에 대해서 만큼은 내가 주류다 하는 마음으로 야심차게 쓴 <아무튼, 술>은 어쨌든 흔하지 않은(글에서도 나오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대낮에 여성이 혼자서 족발에 소주를 마시는 모습을 신기하게 혹은 따갑게 보는 분위기다), 여성이 쓴 술 이야기로 스테디셀러가 될 조짐을 보이는 것 같다.

작가는 고3 때 <수능 백일주>라는, 한때 유행했던 술 문화로부터 기념비적인 음주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비교적 모범생의 끄트머리에 있던 작가는 진짜(?) 모범생들과 주도면밀하게 수능 백일주에 대한 계획을 짜고 약속한 술집에서 거사를 치루는데… 태어나서 처음 술을 무방비 상태로 먹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냥 술이 술을 부르는 것을, 별거 아닌데 하며 술이 목구멍을 타고 계속 넘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별이 번쩍이며 땅이 이마 위로 왔다갔다하고, 몸에는 가스가 찬 것처럼 동작이 불편해지고 차라리 그냥 쓰러져 뻗거나 졸면 좋을 텐데, 작가는 만취한 상태로 친구랑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살벌하게 싸웠다는 것이다. 배추니 김치니 하면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은 상태로…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본능적으로 귀가하여 칫솔질을 하고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잠자리에 들었으나 새벽에 밀려오는 거대한 오바이트! 내 안에 뭐가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지, 폭포처럼 토하고 또 토하고 뱃속이 너덜너덜 해질 무렵, 다시는 술을 마시나 봐라 이를 박박 갈았던 작가는 시간이 흘러 또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난다. 요번에는 첫 번보다는 덜 마시면 좀 낫지 않을까,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 친구들에게 소설 <80일 간의 세계 일주>를 본 따 80일을 남겨 놓고 다시 술자리를 가지면 어떨까 제안하지만, 이미 수능 백일주로 한 번 데었던 친구들은 작가를 또라이 취급하며 거절한다.

작가의 호기심은 대학을 나오고 사회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술 문화에 주당이 되어 간다. 똘똘똘똘 꼴꼴꼴꼴 중간의 소리, 소주 오르골에 감동하며 1차를 부르고 2차를 부른 이야기, 직장인의 힘든 마음을 남들에게 표현하지 못하고 괜찮은 척, 씩씩한 척 지내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거나하게 술자리를 가진 다음 함께 귀가하는 택시 안에서, 노래방에서 사용했던 리모콘으로 운전사 옆좌석에 앉아 기사와 운전 배틀을 벌였다는 이야기, 다음날 택시 기사가 리모콘과 함께 흘린 지갑을 찾아주며 건넨 말 ‘힘 내세요!’ 한 마디에 엉엉 울음이 터져버렸단다.

값비싼 와인에 손을 대었으나 가격을 감당할 수 없어, 세상은 모험을 요구하지만 그에 따른 댓가는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비싼 술은 초장에 과감히 포기하며 깜냥대로 행동한 이야기, 능력을 인정받아 홍콩에서 그럴싸하게 제2의 인생을 보낼 수 있었으나, 너무나 말이 통하는 친구(세상에서 제일 좋은 술친구)를 택해 지금까지 함께 하는 이야기, 그 친구는 작가의 남편이기도 하고… 이렇게 김혼비 작가는 자신이 근 20년 함께 했던 술에 대한 인생을 담백하게 풀어놓는데, 술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작가의 기발한 표현력에서 나오는 주사 이야기가 배꼽을 잡고 웃게도 만들고, 눈시울을 짠하게 하기도 하며 독자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수준이다.

김혼비 작가는 사람을 참 좋아하고 날이 서지 않은, 둥글둥글 뭉특한 연필심 같은 사람 관계를 목말라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술에 대한 애정이 이해된다. 술과 문학을 들여다보면, 역사적으로 문학인과 술의 관계가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녔던 게 일차적이었다. 일제강점기, 알콜중독과 폐결핵으로 생을 달리한 비운의 시인 이상부터 주성이라 불리었던 조지훈 시인, 독재 시대의 김수영, 천상병, 고은, 냉방 시설이 변변치 못했던 1980년대 한여름에 20여일 간 소주만 100병 이상을 마시며 무려 300편 이상의 시를 쓰고 요절한 기형도까지…

시대와 역사적 배경은 작가들을 첨예한 고통으로 끊임없이 내몰았고, 술이 아니면 풀 수 없는 분위기에 무임 승차하여 하나같이 천재라는 타이틀을 달고 술꾼의 삶을 살았거나, 일찍이 단명해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술과 문학의 관계는 분위기가 무겁다 못해 음울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문학인들의 삶이 취기와 광기로 얼룩졌다면, 나보다 20년 정도 뒷세대의 김혼비 작가의 술 이야기는 패기와 상상력이 넘치고 오히려 건강해 보인다. 부모님께 사랑과 영양을 많이 받고 자라 재능 있고 밝고 맑은 심성이, 얄짤없는 냉혹한 사회에 부딪히면서, 술을 빙자한 사람 관계를 통해 따뜻함을 회복하려는, 삶의 균형을 맞추어 가려는 고군분투가 그녀의 술 이야기에서 엿보였다. 술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