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안톤 체호프
출판사 작가정신
제대로 된 문학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 같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가 세상을 떠난지 100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작품이 유독 삶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하는 힘은 뭘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귀여운 여인>, <개를 데리고 있는 부인>, <골짜기에서>등과 같은 유명한 단편들과, <갈매기>, <세 자매>, <벚꽃 동산>등 주옥같은 희곡들에 비하여 <나의 인생>은 비교적 덜 알려진 중편 소설 같은데,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중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던 경험과 아버지로부터 수시로 가해진 매질의 트라우마, 또 의대생 시절, 가난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유머잡지사에 가벼운 단편들을 7년 동안 400편이나 기고했던 고달픈 경험이 토대가 된 소설이고, 그당시 팽배했던 권위주의와 계급주의를 노동의 가치로 타파하려는 주인공의 저항 의식을 골자로 인간관계, 이성 간의 사랑과 배신의 관계가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져, 인생의 의미가 자꾸 쓰디쓴 약초처럼 녹아나는 소설이었다.
주인공 미사일의 아버지는 건축가로 시에서 이름을 날린 유명 인사다. 조상 대대로 귀족 출신의 아버지가 외아들인 미사일에게 거는 기대는 하늘을 찌르지만, 미사일은 번번이 그에 부합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노여움을 산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아버지보다 한창 떨어지는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사는 미사일이 정작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아버지가 가장 경멸하는 노동자의 일이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은 뼈가 닳도록 일을 하는데도 빵 한 조각을 놓고 다투지만, 사무직은 그에 반해 하는 일도 없는데 안정된 삶을 살아갑니다, 왜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내가 그 예외가 됩니까?’ 반기를 들고 아버지의 유산도 포기한 채 집을 나와 도장공의 삶을 택하는 미사일!
아버지와 미사일의 갈등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2000년 대 현시점에도, 기성세대와 젊은이들의 첨예한 갈등이 오버랩되지 않는가?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겪고 어렵게 성장해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외아들이 하는 일은 뭐든지 성에 차지 않는다. 왜 저놈은 빠릿빠릿하지 않으며 마음이 약해 웃기도 잘하며 매사에 하는 행동마다 덜 떨어지는 놈같이 행동할까? 남들보다 뒤쳐지지 않을려면(적어도 나처럼 살려면), 밤을 새워서 눈썹을 밀고 공부해도 션찮을 판에 잠은 많고 음악도 듣는다. 꿈이 뭐냐고 물으니 약자들을 돕고 싶다고 말한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너나 잘 해! 한심하다 이놈아!’ 허구한 날 아들을 비난하면서 평생 혀를 끌끌 차며 살아간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려 아버지 성에 차는 똘똘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모순과 위선, 인간들 위에 자본이 군림하는 사회다.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은 아버지 말처럼 낙오자가 되어 평생을 고통스럽게 사는데, 아들은 좋은 대학을 나왔음에도 화이트 칼라에 넥타이를 포기하고 자영업, 막노동, 시민단체, 버스 운전기사 등, 사회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을 전전긍긍하며 어렵게 살고 있는데, 아버지와의 갈등은 더 골이 깊어져 주인공 미사일처럼 아버지와 원수지간이 되어버린다. 주인공 미사일은 끝까지 노동자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버지와 절연하였는데, 자수성가를 한 아버지의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예를 든 아들은 나의 남편이다.
청년실업에 구직난, 그럼에도 학벌과 인맥을 잡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사회, 부동산 가격은 높고 출산률은 가장 낮고, 청소년 자살률 1위, 독거노인 자살률 1위, 말로는 선진국, 직업에 귀천이 없다 하면서 노동자에 대한 예우는 바닥인 나라… 이런 사회에서 세대 간의 갈등은 러시아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이 이젠 신기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구나 씁쓸할 뿐이지… 주인공 미사일이 도장공의 생활에 접어들면서 그가 그토록 원했던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되어 행복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막상 노동자의 길을 걷고 보니 가장 계급이 낮아 천대를 받던 노동자들이 배우지 못하고 강퍅한 생활에 찌들려 더 험악했던 것이다.
약탈을 일삼고, 욕지거리에 알콜 중독에, 이간질에, 멸시에, 더 뺏으려 들고 도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사일의 뜻에 동조했던 아름답고 열정적인 아내도 농부 학교까지 세우며 계급 타파를 원했건만 노동자들의 행패에 몸서리치며 그의 곁을 떠나간다. 미사일의 갈등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이제라도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 무릎 꿇고 싹싹 빌면, 짐승처럼 험악한 노동자의 삶을 떠나 겉으로는 평온한 귀족 계급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미사일은 그렇지 않았다. 노동자 계급이 아무리 더럽게 행동해도, 그것을 조장하고 만든 계급의 착취와 패악이 더 죄가가 크다라고 판단하고, 끝까지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노동자의 삶에 용해되어 간다. 이제 나는 남편에게 안톤 체호프의 <나의 인생>을 소개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