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옥남
출판사 양철북
저자 이옥남 할머니는 1922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셨다. 지금 살아 계시면 102세가 되는데, 살아 계시는 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가 없다. 할머니는 60세가 넘어서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는데, 일기라고 인식하고 쓴 게 아니고 쓰다 보니 일기가 된 글자의 모음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한글과 글쓰기 교육은 받은 적이 없고, 깊은 산골에서 한평생 밭일 하며 자연인으로 살아온 할머니는 왜 60이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우리들의 어머니 세대는 그랬다. 전쟁의 시련을 겪고 일어서야 했던 격랑의 시기에, 뿌리 깊은 유교 문화가 합세해 뭐든지 아들이 우선이고 딸은 뒷전이고, 특히 교육 문제는 차별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가 중학교 입학 시험을 보려고 공부하니, 할머니가 ‘계집애가 일이나 하지 공부는 뭔 공부여!’ 하며 책을 찢어 버렸던 일, 찢어진 책을 몰래 끼워 맞춰가며 도둑고양이처럼 공부했던 어머니의 학구열은 외가 댁에서는 이미 유명한(?) 일화다.
이옥남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보다 조금 더 전 세대 사람이고, 일곱 살 때부터 길쌈 하는 법, 호미 들고 화전밭에 풀 매는 법은 배웠지만, 오빠들 공부하는 너머로 훔쳐보다, 아궁이 앞에 앉아 재를 긁어 ‘가’ 써보고 ‘나’ 써보고 했던 게 글자 써본 경험의 전부였단다. 열 일곱 살에 시집 가 자식 다섯을 낳고, 글자 쓰고 싶은 마음은 가슴 깊이 새겨둔 채, 모진 시집살이와 방탕한 남편 때문에 일하는 머슴처럼 살다가, 시어머니 죽고 남편 죽고 자식들 다 타지로 분가하고 홀로 살면서, 그제야 적적한 마음에 글자 쓰기를 시작하셨다는데…
할머니의 처음 글쓰기는 웬만한 신인 문학가의 다짐처럼 의욕도 넘친다. 도라지를 까서 장에 내다 판 돈으로 공책을 사서 날마다 글자 연습을 한다. 어떻게 하면 글씨를 예쁘게 써 볼까, 삐뚤빼뚤 늘지 않는 글씨체를 한탄하면서 말 나오는 그대로 생각나는 것, 머릿속에 맴도는 것, 막 써본다. 종일 농사일을 하고 지친 저녁에, 눈 비 와서 농사가 공치는 날, 재미없는 마을 회관 가서 노인네들 똑같은 소리 들으며 시간 낭비하느니, 남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와 공책에 찜해두었던 생각을 글자로 채우는 시간들이 모여 30년, 할머니는 그 세월이 농사일 다음으로 끔찍하게 소중한 시간이었던 듯 하다.
외로우니까, 자식이 보고 싶으니까,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우니까, 늙어서 서러우니까, 뻐국새 소리와 매미 소리, 강낭콩, 도토리, 깨 꽃, 백합 꽃, 버섯, 비 개인 맑은 날을 하늘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며 자연 속에서 일하며 사는 삶을 사랑하니까… 할머니가 30년 동안 쓴 일기 글의 내용은 별 게 없다. 책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 시간대도 뒤죽박죽 편집해 놓았다. 1999년에 쓴 일기나 2005년에 쓴 일기나, 농사일 생각하고 자식 생각하고, 얼추 비슷한 내용이고 시간이 흘러도 표현력이나 문장력은 늘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의 글을 읽다 보면, 문장력이니 표현력이니 하고 갖다 붙이는 게 얼마나 무엄한 일인지 부끄럽기만 하다. 할머니의 생각과 진솔한 느낌들은 하루하루 날 것이고 새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내용을 썼어도 작물들이 커가는 것을 지켜보며 매번 새로운 기쁨을 느끼고, 명절 날 자식들이 오면 반갑다가도 돌아가고 나면 꿈에 본 듯 그리워하는 모습에서, 혼자 사시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어느새 들어와 눈시울이 답답해지고 멈칫멈칫하기 때문이다.
농사 일을 하고 복지관에 다니시면서 자식들에게 ‘나 혼자도 잘살 수 있으니, 너희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너희들 인생을 잘 살 거라’하는 메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때론 몸이 노쇠하여 시름에 젖고 외로워서 울화 병이 나신 우리 어머니, 이옥남 할머니, 이 세상의 혼자 사시는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책을 덮으니 ‘그저 멍하니 있으니 병신 같고 멍청한 바보 짐승 같아서 나는 일을 헌다’, ‘자식이 뭔지 늘 봐도 늘 보고 싶고 늘 궁금하다’, ‘나는 그저 잠만 깨면 밭에 가서 세월을 보내고 이 나이 되도록 이때까지 살아왔다’라는 구절이 뱅뱅 돌고, 나이 들고 고생하신 어머니들의 깊은 심정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의 30년 간의 기록이 아까와 책으로 낸 사람은 손자인데, 우리의 손자들도 언젠가는 그들의 할머니를 잊지 않고 할머니 살아 계실 때, 마음껏 부둥켜 안고 사랑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