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조이스 박(박주영)
출판사 스마트북스
이 책은 추천사에서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도 페미니즘을 잘 표현했으며, 험한 세상(주로 남성 위주)에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단하게 사는 여성들을 위한 작은 위로라는 소개 글을 달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위로를 받았는가? 글쎄, 위로보다는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낀 것 같다.
저자 조이스 박의 30년 경력의 영어 선생님이라는 이력이 특이하게 와닿았고, 영어를 가르치면서 글을 쓰는 내공이 상당하구나 싶었다. <빨간 모자가 하고 싶은 말>은 기존에 있던 유명한 동화들을,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독특한 철학적 시각을 바탕으로 재해석한 책이라고 하겠다. 이책에 실린 21편의 동화들은 <백설 공주>, <인어 공주>, <잠자는 숲속의 미녀>, <미녀와 야수>, <라푼젤>, <푸른 수염>, <백조 왕자>, <빨간 모자> 등, 듣기만 해도 어린 시절 책 읽기의 첫 관문이자 의무적으로 읽었던 세계명작동화들이다.
그런데 이 동화들이 명작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을까? 구태의연한 권선징악, 가부장 이데올로기, 남성 권력구조에 기반한 외모 지상주의, 예쁘고 착한 여자는 끝까지 살아남아 행복하게 살고, 못생기고 거친 여자는 벌을 받거나 불행하게 살고… 이런 말도 안되는 줄거리를 읽으며 어린 마음에도 ‘누굴 바보로 아나?’ 하는 마음이 들었었던… 나는 세계명작이라 불리는 이 동화들을 내 아이들에겐 절대로 읽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저자는 영어 선생님이라 아이들에게 영어 동화 원문을 텍스트로 썼을 것이며, 번역판이 못따라 오는 원문의 맛을 깊이 느끼고 이해하는 사람이다. 거창한 대의 대신, 개인의 고통과 슬픔에 손을 내미는 삶에 관심이 있다는 저자의 마음이, 문학적 소양과 어우러져 <빨간 모자가 하고 싶은 말>을 잉태한 배경이 아닐까 한다. 다른 동화는 차치하고 <빨간 모자>를 맛보기 예로 들어보자.
빨간 모자는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살아야 하는 어린 소녀이며, 어른들이 씌워준 모자와 망토를 두르고 살아야 한다. 어린 소녀가 어른들의 강압에서 탈출하려면 필연적으로 숲으로 가야 하는데, 숲은 모험의 상징이다. 숲에는 지혜로 상징되는 할머니가 있고, 성적으로 굶주린 늑대가 있다. 경험이 없는 소녀는 늑대의 꼬임에 넘어가 늑대의 뱃속으로 들어갈만큼 한없이 추락하는 고통을 느껴야만, 사냥꾼이 나타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다시 살아난 소녀는 이제는 어른들이 강요하는 빨간 모자를 거부할 수 있는 존재로 한층 성숙해진다. 참 신박한 해석 아닌가? 다른 동화도 새롭고 놀라운 해석이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경험해보면 좋겠다.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를 반감으로서만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응하는 실력을 쌓음으로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이것이 부끄러웠다.